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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H.U.Seol M.D.,Ph.D.
첨부파일   1119961059_1119916277_DSC_0004_Bm57Cp55_W752H.jpg (63.9 KB), Download : 55
제 목   부처님의 수행법
부처님의 수행법
                       ----- 한단마을 자료실에서
수행의 실제

위빠사나의 수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섯 감각기관 (眼,耳, 鼻,舌,身.意) 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육 체적 작용의 관찰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공부의 대상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 부처님께서 설하신 염처경을 기초로 한다.
이 책에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수행되고 있는 마하시 스님(버어마)에 의해 확립되어진 수행법을 소개하겠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고 기초적인 것들을 소개했는데 혼자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수행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수행하는 중에도 자주 수행 경험이 있는 스님을 찾아서 지도를 받는 것이 좋다. (남방의 선원에서는 거의 매일 혹은 격일로 큰스님께서 수행점검을 하고 지도를 해주신다.) 기초 수행 단계로써 제일 좋은 방법은 단기 출가(수행하는 동안 집을 떠나 선원에서 생활 하는 것)로 집중적으로 수행법을 익힐 수 있는 이상적인 형태이다. 우 리 나라에도 하루빨리 스님이든 일반신도이든 누구나 원할 때는 찾아가서 수행할 수 있는 위빠사나 선원이 세워져야 할 것이 다.

1. 좌 선 (坐 禪)

1) 앉는 방법
염처경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숲 속 나무 아래나 조용한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다리를 포개고 앉은 다음 몸을 바르게 세우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
우선 수행자는 간편하고 느슨한 옷차림을 하고, 좌선하는 동안 방해를 받지 않을 가급적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다리를 포개고 앉는다. 결가부좌가 가장 안정된 자세이긴 하지만 어려우면 반결부좌나 그 밖의 편한 자세로 앉아도 된다.  요즘 우리 나라도 입식문화가 보편화되어 다리를 겹치고 바닥에 앉는 자세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수행을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의자를 사용하지 않고 앉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다. 이 경우에 일어나는 다리의 통증도 위빠사나에서 좋은 공부의 주제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 앉은 자세가 삼각형 모양으로 안정되게 한다.
다음, 허리에 힘을 약간 주어 등과 머리를 곧게 세운다. 이때 너무 힘을 주어 뻣뻣해도 안되고 힘을 너무 빼서 느슨해도 안 된다. 어깨를 한 번 올렸다가 내려뜨려 어깨에 힘을 빼고 편하게 한다. 오른쪽 손바닥 위에 왼손을 올려놓아 엄지 손가락 끝이 서로 닿게 해서 다리 위에 올려놓는다. 그 다음 눈을 가볍게 감으면 준비는 끝난다.

결가부좌 : 양쪽 발을 반대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완전히 올려놓는다.
반결가부좌 : 한족 발만을 반대쪽 다리 위나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다.
다른 방법 : 양발을 모두 반대쪽 다리 위에 올려놓지 않고 바닥에 닿게 놓는다.
손의 모양 :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손을 포개고 엄지 손가락이 서로 살며시 닿게 한다.

2) 호흡에 마음 집중하기
숨을 들이쉴 때 배가 팽창되고 내쉴 때 배가 수축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바로 이 두 동작에 주목한다. 호흡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배가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려고 억지로 숨을 크게 쉴 필요는 없다. 숨을 들이 쉴 때 배가 일어나는 동작에 주목하고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지는 동작에 주목한다.
들이쉬거나 내쉴 때, 각각 일어나는 배의 움직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배에 마음을 밀착하여 한 순간도 틈을 주지 말고 따라간다. 수행의 기초단계에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을 분명히 느끼지 못한다면 한 손, 또는 두 손을 배에 대고 할 수도 있다.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동작이 일어날 때 각각 "일어남" "꺼짐" 이라고 마음 속으로 뇌인다. 입 속에서 우물거리거나 소리를 내지 말고 마음으로만 해야한다. 이 이름 붙이기는 마음을 집중의 대상에 주목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동작에 얼마나 마음을 밀착시켜 따라 가고, 주목할 수 있느냐이다.
일어남이나 꺼짐에의 마음집중은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과 동시에 되어야 한다. 일어남과 꺼짐이 항상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짧게, 빠르게, 느리게, 분명하게, 불분명하게, 굵게, 섬세하게, 긴장되게, 느슨하게, 계속적으로 혹은 단속적으로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고 주목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수행을 통해서 결국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의 무상함과 고(苦), 무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은 바람요소의 특성-동작, 이완, 긴장, 견고함 등--이 주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작들을 관찰할 때 염처경의 '물질적 요소에의 마음집중' 에서 나오는 바람요소의 설정을 실제로 관찰한다.
여기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수행에 관련된 이론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실제 수행하는 동안은 이렇게 생각하거나 분석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 아! 이 동작은 바람의 요소이고 저 딱딱함은 땅의 요소이다." 등으로 생각하거나 분석해서는 안된다. 일어나는 것들을 생각이나 분석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느낌들을 알아채고 관찰해야 한 다.

3) 마음 집중이 흩어질 때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할 때 자주 마음이 흩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이 흩어지면 그 흩어진 상태를 알아채고 '흩어짐' 또는 '생각' '생각' 하면서 흩어진 상태에 주목한다.
또 생각으로 걱정을 하고 있으면 '걱정' '걱정'하면서 그 상태에 주목하고,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으면 '계획' '계획' 상상하면서 '상상''상상',  과거를 회상하면 '회상''회상'하는 방법으로 그 상태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렇게 마음집중을 하고 있으면 저절로 생각이 끊어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상태에 마음을 집중한다 .
이상의 설명에서처럼 위빠사나 선에서는 끊고 버려야 할 생각(망상) 이 없다. 집중하던 곳에서 마음이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가면 그곳을 다시 집중하면 된다. 즉, 망상조차도 공부의 대상이 된다. 만약, 어떤 소리에 주의가 끌리면 '들림''들림'하고 주목하다가 더 이상 주목하지 않게 되면 다시 돌아와서 '일어남''꺼짐'을 한다. 또 몸의 어떤 부위나 얼굴이 가려우면 '가려움' '가려움' 하고 주목한다. 일어나는 감각에 마음을 밀착시켜 그 감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더 강렬해지는지, 사라지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하도록 노력한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어서 긁고 싶어지면 긁고자 하는 의도에 주목한다. 그리고 나서도 아직 긁지 말고 잠시 동안 기다려보고 더 집중하다 보면 긁고 싶은 욕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긁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면 긁을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천천히 해야 한다. 긁는 동작을 포함한 모든 동작을 포함한 모든 동작 즉, 가려운 부위 쪽으로 손을 들어 올림, 닿음, 긁음, 시원한 감각, 본래의 자리로 손을 옮겨놓는 동작을 빠짐없이 관찰한다. 가려울 때처럼 아플 때도 '아픔'' 아픔'한다. 찌르는 듯한 아픔인지, 에이는 듯한 아픔인지, 잡아당기는 듯한 아픔, 또는 뒤틀리는 아픔인지 아픔의 종류를 알고 면밀하게 관찰한다. 또 아픔이 그대로인지 변하는지, 아픈 부위가 한곳인지 주위에 옮겨 다니는지 이런 방법으로 아픔의 여러 가지 양태에 주목한다. 정신적인 저항없이 고요하고 초연하게 아픔에 주목한다. 아픔이 사라지기를 혹은 그대로 있기를 바라서 는 안된다.
만약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사라지기를 바라는 욕구를 주목해야 한다. 아픔이 사라지든지 그대로 있든지 에는 초연해 야 한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주목할 수 있다면 아픔을 참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아픔은 우리를 빈틈없이 깨어있게 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선의 좋은 수행 대상이다.
이 아픔에 주목하기를 통해서도 역시 닙바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아픔이 사라지면 다시 배의 '일어남' 과 '꺼짐'에 주목한다. 아픔을 참을 수 없게 되어 다리를 바꾸거나 몸을 펴고자 할 때는 가려움에 주목할 때와 같은 요령으로 즉시 바꾸지 않는다. 바꿔놓고 싶은 욕구에 주목하고 아픔에 조금 더 주목한 다음 그래도 바꿔야 갰다면 아주 천천히 모든 움직임에 집중하고 관찰하면서 자세를 바꿔야 한다.
침착하지 못함, 지루함, 졸림, 혐오감, 화, 갈망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상태들이 좌선 중에 쉽게 일어날수 있다. 이런 상태 가 일어날 때도 역시 먼저 알아채고 주목한 다음 다시 배의 일어남과 꺼짐으로 돌아간다.
좌선을 하는 동안 어떤 빛이나 환상 등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역시 그때도 이 빛이나 상(相)을 '보임''보임' 하면서 주목한 다. 이들 빛이나 상에 너무 오래 주목해서는 안된다. 잠시 주목한 다음 다시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한다.
초보자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하기를 끈기 있게 해야한다. 끈덕진 노력에도 불구하고'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할 수 없을 때는 '앉음' 과 '닿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일어남' 과 '꺼짐'에 주목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봐 야 한다. '일어남'과 '꺼짐'이 공부의 좋은 재료이고 많은 수행자들이 이것에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이고 혹은 몇 주 동안이라고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의 집중이 선명해질 때까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어남''꺼짐'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그때 '앉음'과 '닿음'에 주목할 수 있다. '앉음'에 주목할 때는 바로 앉아 있음을 알아채면 된다. 그냥 똑바로 앉아 있음을 알면 된다. '앉음' 하면서 바른 자세에 주목하고, 그런 다음 오른쪽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감각에 주목한다.
다시 '앉음', 이어서'닿음'하는데 이번에는 두손이 같이 놓여져 있는 감각에 주목한다. 다시 '앉음'에 주목하고, 이어서 왼쪽 엉덩이의'닿음'에 주목한다. 다시 '앉음', 이어서 '닿음' 하는데 이번에는 두손이 같이 놓여져 있는 감각에 주목한다. 이런 방법으로 세곳에 '닿음'을 하는데 매번 교대로 '앉음'도 같이한다. 즉 '앉음''닿음Ⅰ'앉음''닿음Ⅱ''앉음''닿음Ⅲ"의 방법으로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앉음'과 '닿음'의 주목을 일정하게 빠른 속도로 할 수 있게 되고 '닿음'의 지점에 점점 더 분명하게 마음 집중이 된다
'앉음'과'닿음'에 집중하는 동안 배의 '일어남'과 '꺼짐' 이 분명해지면 다시 '일어남' 과 '꺼짐'의 집중으로 돌아간다.

2. 걷기 선 (行 禪)
걷기 선은 염처경에서 비구들에게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라' 라고 말씀하신 '몸에 집중하기' 장에 있는 수행법이다. 염처경 21장의 어느 수행 법을 통해서도 지혜의 완성인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걷기 선은 수행자의 노력(힘) 기능을 자극해서 좌선을 주의 깊고 빈틈없이 하도록 돕는다. 걷기 선이 없는 긴 시간의 좌선은 노력, 또는 힘과의 균형을 잃은 과도한 정신집중이 될 수 있어 나태함이나 졸음이 끼여들 수도 있다. 그래서 집중적인 수행(단기출가) 때는 걷기 선 한시간, 좌선 한 시간씩으로 걷기와 앉기의 균형을 맞춘다.
선원에서는 보통 하루 열 다섯 시간씩 정진을 하는데 걷기선 일곱 시간, 좌선 여덟 시간으로 시간 배정을 한다. 수행자는 물론 그 외의 시간(공양, 목욕, 화장실 사용 등)에도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마음 집중을 해야 한다.
걷기 선을 할 장소는 열 다섯에서 스무보 정도 거리의 방안이나 그 밖에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곳이면 좋다.(한적한 공원, 강가 ,바닷가 등이라면 아주 좋은 걷기 선의 좋은 장소가 된다.)
먼저 바로 서서 양손을 앞으로, 또는 뒤로 모아서 서로 맞잡고 눈을 반쯤만 뜬다.(이 때 반쯤 뜨는 것이 어려우면 그냥 평소처럼 뜨고 있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처음엔 어렵더라도 계속 노력하면 곧 익숙해질 것이다) 고개를 약간 숙여도 되지만 너무 숙여서 발이 시야에 들에 오거나, 목이 아프거나 해선 안된다. 걷기를 할 때 의식적으로 발을 너무 높이 들지 않는다. 또 걷기를 하는 동안 이곳 저곳 주위를 둘러봐서도 안된다. 이 수행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밖으로 향한 시각을 내면의 세계에 집중 해보자. 걷기 정진을 하는 중에 둘러보고 싶은 생각을 일으키는 요소가 생기면 보고 싶은 생각에 잠시 집중하면 된다.
좌선 전에는 반드시 시간을 안배해서 걷기 선을 해야 한다. 「in this very life」에서는 걷기 선의 효과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 먼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유지하게 하고,
둘째, 선 자체의 수행을 위한 힘을 얻을 수 있고,
셋째, 좌선과 걷기 선의 균형은 몸을 건강하게 해서 수행의 빠른 진전을 돕고,
넷째, 걷기 선은 소화를 돕는다. 또 새벽잠에서 깨어 바로 좌선을 할 때 생기는 졸음을 피 할 수 있는 좋은 수행법이고,
다섯째, 좌선 전의 걷기 선은 좌선 때의 마음 집중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걷기 선은 다음과 같이 여섯 단계로 나누어 수행할 수 있다.

1 단계 - '왼발''오른발'
2 단계 - '들림''놓음'
3 단계 - '들림''나아감''놓음'
4 단계 - '뒤꿈치 들림''들림''나아감''놓음'
5 단계 - '뒤꿈치 들림''들림''나아감''낮아짐''닿음'
6 단계- '뒤꿈치 들림''들림''나아감''낮아짐''닿음''디딤'

2. 걷기 선 (行 禪)

1 단계 걷기선
보통 속도로 걷거나 빨리 걸을 수 있다. 걸으면서 발에 마음을 집중하고 각 걸음에 '왼발''오른발'하면서 마음 속으로 뇌인다. 한쪽 끝까지 와서 돌아가야 될 때는 그 지점에 서서 '회전''회전' 하면서 돌아 다시 '왼발' '오른발' 하면서 걷기에 집중한다.

2 단계 걷기선
각 걸음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주목하는 방법이다. 발이 들리는 순간에 '들림' 내려놓을 때 '놓음' 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주목한다. 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면밀하게 관찰한다. 발에 닿는 감각이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차가운지, 따뜻한지 등에 주의하면서 주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한쪽 발이 완전히 바닥에 닿았을 때 다른 쪽 발을 들어올린다. 끝까지 걸어서 멈출 때는 '멈춤' '멈춤'하고 주목한다. 돌아설 때도 천천히 발을 들어 돌면서 '회전' '회전'하고 주목한다. 완전히 돌아서서 다시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서서 서 있는 자세에서 '서있음' '서있음'하고 나서 걷기를 시작한다.

3 단계 걷기선
여기서는 발의 '들림''나아감''놓음'에 주목한다. 발을 들면서 '들림'에 주목하고, 발을 앞으로 옮기면서 '나아감'에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놓음에 주목한다. 물론 걸음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의 모든 동작을 면밀하게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따라가야 한다. 걸으면서 식별될 수 있는 가벼움, 무거움 등의 모든 감각들을 알아채야 한다. 끝까지 걷고 난 다음 돌아설 때는 위의 1, 2 단계의 요령대로 되풀이하면 된다.
나머지 4,5,6단계도 위의 1,2,3 단계와 같은 요령으로 하면 된다. 가령 한시간 동안 걷기 선을 한다면 초기 수행단계에는 1 단계 20분, 2단계 20분, 3단계 20분 등으로 시간을 안배하고 정진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4,5,6 단계의 정진을 한다. 또한 앞서도 지적했지만 좌선 전에 꼭 이 걷기를 하도록 한다.

3. 서 있기 선 (住 禪)
'서 있음'은 걷기 선을 할 때 주로 하는 수행이다. 즉, 출발하기 전, 또는 다 걷고 멈춰 서서 돌아서기 전에 집중을 한다. ' 서 있음' 에 집중할 때는 서 있는 자세와 함께 바닥에 발바닥이 '닿음'을 번갈아 가면서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있기' 선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또 무릎관절이 약해지거나 꿈 같은 상태의 삼매에 빠질 수도 있다. 또 서 있는 동안 몸의 흔들림이나, 쓰러질 것만 같은 두려움을 경험했다는 수행자들이 많다. 반면에 '서 있기 ' 선은 졸음이 심하게 올 때 정진을 하기에는 좋은  방법이다. '서 있음'에 마음 집중을 하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비로 쓸어내리 듯이 집중을 하거나, 가만히 서 있는 동안 일어나는 감각들에 집중 할 수 있다. 또 가끔씩 '일어남'과'꺼짐'에도 집중한다.  통근 길의 전철, 버스에서도 정진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4. 누워서 하는 선 (臥 禪)
이 자세는 보통 정진(일과)이 끝나고 잠들기 전에 행하는 것으로, 진지하게 정진을 할 때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세로 아주 주의 깊게, 빈틈없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수 있다면 오랫동안 정진을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잠들기 전에 보통의 가벼운 마음 집중으로 정진하다가 잠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눕는 자세는 몸의 오른쪽이 바닥에 닿도록 모로 눕는 것이 좋다. (사자와). 등을 대고 반드시 눕거나, 왼쪽으로 누워서 편하다면 이런 자세도 상관없다. 누울 때의 동작에도 마음 집중을 하고 누운 후에는 '누움' '닿음' (머리, 어깨, 엉덩이, 다리, 발 등)에 주목하고, (복부의)'일어남'과'꺼짐'이 분명하면 여기에 집중한다. 그 외에 일어나는'생각''소리 들림''아픔'등도 좌선 때 와 같은 요령으로 집중한다. 이 정진이 잘되면 수면상태에 드는 것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알 수도 있다.

5. 일상 생활에서 선
염처경에서는 먹고, 씹고, 화장실 다니고, 옷을 입고, 벗고, 말할 때나 침묵을 지킬 때, 앞이나 멀리 볼 때 등 일상에 마음 집중하기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항상 마음집중이 되도록 훈련을 해야한다. 그렇게 될 때 마음집중은 강력해지고, 예민해지고, 생활에 유용해진다. 여기서 '항상'이란 끊임이 없음을, '모든일'이란 융통성을 말한다.
일상의 행동에 마음집중을 적용하지 못하면, 정신적, 육체적 일들의 균형과 통합 같은 마음집중의 효과를 감소시킨다. 일상 생활에서 알아채고, 집중해야 될 일은 아주 많다. 그렇게 하지 못함은 주위에서 일어나고, 영향을 받고 있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하고, 맹목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슨 일을 하면서 선(禪)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정진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생활하면서 늘 하게 되는 일에 조금씩, 조금씩 마음집중의 영역을 확대시켜 나간 다면 언젠가는 완전한 마음집중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상 위에서 소개한 위빠사나 수행법은 가정에서나 단기출가수행(수련 법회)에서 초기단계의 정진을 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진과정에서는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럴 때는 수행경험이 있는 스님의 조언을 구하고 그에 따라서 정진해야 한다.
원컨대 모든 수행자는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열심히 정진하여 깨달음과 모든 고통의 소멸 상태인 닙바나를 중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위빠사나 선의 기초

<역자 주>
'위빠사나 선의 기초'는 죠셉 골드스틴의 " The Experience of Insight:A natural  Unfolding"(Unity Press,1977)의 발췌 번역입니다. 내용은 위빠사나 선의 기초 훈련으로 미국 제일의 위빠사나 선원인 메사츄세츠주의 Insight Meditaion Center에서 초심자들을 위한 2주 코스의 용맹정진 지도 내용입니다. 인사이트 메디테이션 센터는 메사추세츠 주 한적한 시골,  버스 편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데 본래 가톨릭 수도원이었던 곳을 인수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색은 미국인들이 동남아(태국, 버마, 인도)에서 몇 년 씩 선사에게 지도를 받은 다음 돌아와서 현대인들에게 맞게 실용적인 방법으로 지도하여  누구든 2주 과정을 마치면 혼자서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 구체화해 놓은 프로그램입니다. 위빠사나 선은 부처님 당시에 실천되었던 '해탈을 위한 유일한 길' 이라고까지 강조되었던 선법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남방 불교에는 잘 전승되어 왔고  서양에도 일찍이 소개되어 누구든 쉽게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생활 선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역자는 1979년 가을 인사이트 메디테이션 센터를 방문, 용맹정진을 함께 하였고 회향식에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기도 했습니다. 근래 들어 위빠사나 선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때에 앞으로 연재할 예정인 이 글이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전통적으로 불교의 용맹정진 기간은 부처님, 가르침, 승가에 귀의하는 이른바 삼귀의로 시작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은 우리들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참 자유의 가능성인 깨침의 씨앗, 부처의 씨알을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또 부처님께서 갖추셨던 용기와 지혜, 자비의 덕성에 귀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와 존재의 법칙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돌아간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진리가 우리들 자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로 돌아가 의지하고 자유와 깨침의 길에서 서로를 돕는 것을 뜻합니다. 위빠사나 선 수행에 있어서 빼놓은 수 없는 중요한 기초는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은 몸과 말, 생각을 청정하게 하는 기본입니다. 이 수행기간 동안에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가지 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불살생.  이것은 산 목숨을 의식적으로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모기를 쳐서 잡는 일이나 개미를 밟아 죽이는 일도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둘째, 불투도. 허락되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불음. 남녀간의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 정진 기간 동안 독신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불망어. 거짓말이나 남을 해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섯째. 불음주. 이 정진 기간 동안 술이나 환각제를 멀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계율을 지키는 것은 선정과 지혜를 증진시키는 튼튼한 기초를 닦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도량에 모여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찾아보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정전이 원만하고 조화롭게 되기 위하여 몇가지 중요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참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이 용맹정진 기간이 끝도 없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지고 도대체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특히 추운날 새벽 4시 반에 일어날 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해보면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수행 자체가 아름답고 지혜가 넘쳐 흐르는 것 같지만, 또 어떤 때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우며 불안정하고 의심에 휩싸일 때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모든 때에 잘 참고 견디는 일은 우리들의 마음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티벳의 투룽파 림포체에게 "은총"이란 말이 불교에서는 무엇에 대비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참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참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낼 것입니다.
  
참는 마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며 항상 마음이 평안하면서도 성성한 상태를 말합니다. 티벳의 유명한 밀라레파는 제자들에게 항상 "단단히 그러나 천천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은 지속적이고도 쉼없는 노력, 그러나 평안하고 조용한 마음, 즉 끊임없이 정진하되 푹 쉰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을 심화시키는 또다른 도움은 침묵입니다. 말은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지게 하고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 때문에 우리의 마음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볼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에너지는 '안으로 비추어 보는 힘'을 개발하는 데에 활용될 수가 있습니다. 선의 실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묵언에 있어서도평안하고 쉰 자세란 말을 여의고 그저 침묵 속에 침잠하여 조용히 그러면서도 맑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묵언을 함으로써 우리들의 정신적 육체적 행위는 아주 분명해집니다. 묵언은 더 깊은 마음의 침묵을 가능케 합니다.
친구나 부부 간의 관계도 멀리하십시오. 혼자되는 일을 배우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또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선입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 이 시간을 각자 자신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우리는 죽을 때 혼자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고독'과 친숙해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 마음은 평화롭고 강인해지며 다른 사람들과 훨씬 아름다운 만남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이 엮어가는 만남은 더욱 평안하고 뜻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 저것 다른 수행을 섞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여러가지 수행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진 기간 동안에는 위빠사나 , 즉  '안으로 비추어 보는 관'을 개발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밝게 비추어 봄(mindfulness)을 통하여 '안으로 비추어 보는 관(insight)'은 개발됩니다. 이 기간 동안 온통 순간순간 밝게 비추어 보는  일에 모든 노력을 집중함으로써 우리들의 수행은 심화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모든 노력이 경주된다면 마음은 사물을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질 것입니다. 매사에 느슨해지는 것 또한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서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갈 곳도  할 일도 따로 없습니다. 그저 매순간에 안주하십시요. 하루 종일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위, 낱낱의 움직임을 관찰하십시오. 지속적인 관찰을 통하여 우리들의 수행은 심화될 수 있습니다.  

일정표
매일의 수행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전      4:30              기상                
             5:00 -  6:30      경행 및 좌선        
             6:30 -  7:30      아침공양            
             7:30 -  8:00      경행                
             8:00 -  9:00      좌선                
             9:00 -  9:45      경행                
             9:45 - 10:45      좌선                
            10:45 - 11:30      경행                
                                                  
   오후     11:30 -  1:15       점심공양 및 휴식  
             1:15 -  2:00       좌선              
             2:00 -  2:45       경행              
             2:45 -  3:45       좌선              
             3:45 -  5:00       경행 및 좌선      
             5:00 -  5:30       차마시기          
             5:30 -  6:00       경행              
             6:00 -  7:00       좌선              
             7:00 -  8:00       강의              
             8:00 -  8:45       경행              
             8:45 -  9:45       좌선              
             9:45 - 10:00       차마시기          
             10:00 ~             취침 혹은 수행  

앉는 수행
이제 우리는 호흡을 관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좌선을 시작하려 합니다.  어떤 자세든 가장 편한 자세로 앉으십시오. 단, 긴장을 풀고 허리를 쭉 펴십시오.  허리가 꾸부정하거나 비뚤어지면 쉽게 불편을 느끼게 됩니다. 원하다면 의자에 앉아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은 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반쯤 뜬 자세를 좋아한다면 그것도 무관합니다. 눈을 뜬다고  해도 단순히 시선을 한 것에 머물게 하는 것 뿐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편안한  자세로 감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호흡에 대한 관은 다음 중 한가지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숨을 들이쉬면 단전 부분이 자연히 올라오고 반대로 내쉬면 내려갑니다. 단전부분의 움직임을 느끼십시오. 상상이나 형상화하지 말고 그저 그 움직임을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절대로 호흡을 조정하거나 억지로 하면 안됩니다. 단순히 단전부분이 올라오고 내려가고 하는 움직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호흡을 할 때 공기가 코구멍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 때 관하는 부위는 코 끝이나 윗 입술 부분입니다. 이 호흡에 대한 관은 마치 수위가 문을 지키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빼놓지 않고 관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호흡을 끝까지 따라 내려가거나 따라 나가지 마십시오. 또 호흡을 조정하거나 억지로 해서도 안됩니다. 단순히 들숨 날숨이 코 끝을 통과하는 대로 관하면 됩니다.
처음 훈련을 시작한 경우에는 '올라온다', '내려간다' 혹은 '들어온다' '나간다' 하고 마음으로 따라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그 대상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몇 분 동안 위의 두가지 방법 중 어느 것이 더 선명한 지 시험을 해 보십시오.  즉  '올라온다-내려간다' ' 들어온다-나간다' 중에 더 선명한 것을 선택하십시오.  선택했으면 왔다 갔다하지 말고 끝까지 그 방법으로 하십시오.  
때로는 관이 선명치 않게 되더라도 다른 방법이 더 좋을 것이라 하여  바꾸지 마십시요. 한 번 결정했으면 끝까지 그 방법을 지키십시오. 호흡은 때로 분명하기도 , 그렇지 않기도 하며 깊이고 옅기도 하고, 또 길기도 짧기도 합니다. 이 관은 호흡훈련이 아니라 밝게 보는 정념의 첫 훈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걷는 훈련
걷는 선은 걸음 마다에 발을 들어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 내려놓는  동작 하나하나를 관하는 것으로 됩니다. '들어올린다, 나아간다.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죠. 동작의 하나 하나를 잘 관하기 위해서 다른 걸음을 떼놓기 전에 한 걸음을 완전히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 역시 동작의 훈련이 아니라 관의 연습입니다. 발의 움직임을 관을  개발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지요.
이 걷는 선을 하면서 하루 동안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천천히 걷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들어올린다-나아간다-내려놓는다' 하고 세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걸음걸음을 '내딛는다, 내딛는다' 하는 식으로 관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같은 걷는 선에서 처음에는 빨리 걷다가 나중에는  천천히 걸으면서 다시 '들어올리나-나아간다-내려놓는다' 의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실험을 해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명히 관하는 것입니다. 손은 등 뒤에 뒷짐을 지거나 옆에 두거나 앞에 모으거나 일정하게 하면 됩니다. 눈은 발보다 조금 앞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발을 쳐다 보게 되면 산만해질 수 있으니까요. 모든 주의는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 동작 그 자체를 느끼는 데 두어야 합니다.
처음 며칠이나 일주일 정도까지는 가능한 한 일정대로 따르십시오.  나중에 하루를 지속적으로 관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고 편안해지면  각자에 맞는 스케줄 조정도 자연히 될 것입니다.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쉬지말고 좌선과 경행을 하십시오. 공양이나 그 밖의 모든 행위도 하나 하나 관하면 그것이 다 수행입니다.
어떤 때는 더 오랫동안 걷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반을 걷고 그런 다음 앉아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오래동안 앉기를 원하여 한번에 2-3시간을 앉게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밤늦게 까지 있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선수행이 깊어질 수록 잠은 점점 덜 오게 됩니다. 잠은 습관에 따른  일정한 시간이 아니라 정말로 피곤을 느낄 때 자십시오. 선이 잘되면  피곤을 모르고 밤낮으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각자에 맞고 무리 없는 노력을 가능케 하는지 잘 분별해 보도록 하십시오.
성프란시스 싸레시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모든 사람에게 참을성 있게 대하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향하여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결함에 대하여 실망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용기로 일어나십시오. 매일매일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영적인 삶의 성취에 있어서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과 '이만하면 됐다' 하고 자만하지 않는 마음보다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결함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웃의 결함에 너그러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실패에 안절부절 하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만 훌륭한  시정은 가능합니다"

느낌의 관찰  

* 느낌과 느낌의 관
마음의 작용 가운데 하나인 느낌을 관찰하는 일은 위빠사나 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느낌이란 좋다 , 싫다, 싫지도 좋지도 않다는 세 가지를 가리킵니다. 우리들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고 미워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좋다 싫다'하는 느낌 때문입니다.  
즉, 마음에 드는 즐거운 느낌이나 대상은 가까이 하려하고 ,  그렇지 않은 것은 미워하고 멀리하려 하니까요. 그러나 이 느낌들을  밝게 비추어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그들을  조용한 마음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느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우리 몸입니다. 우리는 몸에 나타나는 감각들을 즐겁다거나 고통스럽다고 분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각들을 잘 비추어 보는 일은 느낌에 대한 관을 개발하는 훌륭한 방법이 됩니다.
기쁨에 차고 ,경쾌하고 ,가슴설레는 느낌 등에 사로잡혀 집착하거나,  혹은 고통스럽고 긴장된 상태를 싫어하고 회피하려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도 비춰봐야 합니다. 즉 , 덥고, 춥고, 가렵고, 불안하고 명랑하고 슬픈 등의 감각이나 그와 관련된 느낌이 일어날 때 그에  집착하거나 멀리하려 하지 말고 그저 보라는 것입니다.

* 호흡과 느낌의 관
호흡을 관하는 것으로 우리의 좌선은 시작됩니다. 즉 , 호흡을 할  때 단전부분이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이나, 콧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관하는 것이 좌선의 기본입니다. 그런 기본 관을 하다가 만일 몸에 어떤 감각이 느껴지면 오직 그 감각만을 100%비추어 보십시오.   이 때 긴장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몸에 강한 고통을 느낄 때 더욱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고통에 대응할 때 긴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긴장은 고통스러운 것을 싫어하고 회피하려는 징표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조용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고통 그 자체와 흐름을 관찰하십시오.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며 주의 깊으면 고통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 순간 일어났다 없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경험됩니다.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앉아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을 버리고  단순히 감각의 흐름만을 비추어 보십시오.
통증은 관의 좋은 대상이 됩니다. 몸에 강한 통증이 있을 때 집중 또한 강해질 수 있습니다. 강한 통증으로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몸에 어떤 감각이 현저히 느껴지거든 그때마다 그것을 관하십시오. 그리고 그 감각이 사라지면 기본 호흡관으로 돌아가십시오.   예를 들어 '올라온다 - 내려간다' 하고 호흡을 관하다가  허리에 통증을 느끼게 될 경우 마음을 허리 부분에 집중시키어  '아픔 아픔'하고 비추어 봅니다. 그러다가 아픔이 사라지면 다시 '올라온다 - 내려간다 '하는 기본 호흡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려움이나 저림이 느껴질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통증으로 인하여 마음이 긴장되거든 그 긴장과 불유쾌함 자체를 조심스럽게 관찰해 보십시오. 그 느낌 자체를 이렇게 비추어 봄으로써 마음은 스스로 균형 상태에 들게 됩니다.

그저 봐라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2천 5백년 뒤에 불법이 다시 새로워지고  꽃피리라는 옛 예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수행에 대한 대중들의 깊은 관심을 통해서 이 예언이 사실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법이라고 할 때 법, 즉 Dhalma의 뜻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달마란 범어로 진리, 사물의 실살, 그리고 좁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또 모든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정신과  물질적 요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수련의 과제 또한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이런 요소들, 즉 개개의 법을 알고 이해하며 또 그들이 어떤 법칙에 의해 서로 관계하고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훈련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의  참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경험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저 바라봄
진리에 눈뜨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그저 보는(bare attention)' 관찰입니다. 그저 보는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들의 선호나 비교, 평가, 설계, 기대를 다 비운 채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저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저 보는 '것은 바쇼의 유명한 시에 그 특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한마리 뛰어든다
풍덩!
이 시에는 연못 저편에 지는 석양이나 아름다운 하늘에 관한  드라마틱한 묘사가 없습니다. 그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맑고 투명한 지각이 있을 뿐입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한마리 뛰어든다. 풍덩!" 그저 볼 뿐, 소박하고 직접적인 관찰이 있을 뿐입니다.  그 밖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보는 것은 강력히 꿰뚫어보는 마음입니다.  그저 보는 능력이 개발되면 우리들 생에 기본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입니다. 즉, 현개의 순간에 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서 과거에 살거나  걱정 불안과 함께 닥쳐올 미래를 설계하는 일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 마음은 과거의 회상에 잠기거나 미래의 환상에 빠져있어 현재의 순간에 머물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저 보는 것'은 우리를 지금, 여기에 깨어있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비추어 보는 마음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전념하여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완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불교에 현재의 순간에 사는 예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스님이 절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장마가 져 길은  질퍽거리는 진흙 땅이었습니다.  어느 골목에 이르렀을 때 한 아름다운 쳐녀가 진흙길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를 본 순간 첫번째 스님은 그녀를 들어 건네주었습니다.  두 스님은 절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쉬면서 두번째 스님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뱉았습니다.
"출가한 스님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인을 쳐다보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일인데   들어서 건네주다니..."
그에 대해 첫번째 스님은
"나는 그녀를 그 곳에 내려놓고 왔는데 스님은 아직도   짊어지고 다닙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저 보는 능력이 개발되어 우리들 내부에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있는대로 관찰하게 되면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훨씬 자유롭고 가식없는 경험과 대응을 하게 됩니다.

*  '그저 봄'과 마음의 평화
'그저 봄'은 또한 마음을 고요하게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대상에 따라 맹목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즉, 마음에 드는 대상에는 집착하고 매달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싫어하고 멀리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보는 힘이 개발되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생각과 느낌 , 그리고 주위의 환경을 애착과 미워하는 마음 없이 순수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조용하고 조화로운 마음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완전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저 보는 관찰은 아침이나 저녁의 앉는 시간에만  국한 되어서는 안됩니다. 좌선할 때는 비추어 보고  나머지 시간엔 그러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런 수행은 우리의 삶을 분산시키고 따라서 진정한 수련의 성숙은 어렵습니다.  밝게 비추어보는 훈련은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먹거나 하는 모든 순간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훈련은 모든 대상에, 모든 마음의 상태에 ,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실천하여야만 합니다.  매 순간순간 전력으로 완전히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잘되면 그저 보는 관찰은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보는 관찰의 또다른 속성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악기을 배울 때 경험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처음 우리는 설명을 듣고 시범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연습을 시작하지요.  처음에는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고 엉뚱한 건반을  두드려 소리는 엉망이 됩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연습을 하면서 손가락도 쉽게 움직이게 되고 음악은 점점 아름다워집니다.
나중에 숙달이 되면 연주 자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때엔 연주와 연습이 다르지 않습니다.  연주 그 자체가 연습이지요.  
위빠사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들어올린다 - 나아간다 - 내려놓는다'고 관하고 , 호흡을 관하면서도 '올라온다 - 내려간다'  혹은 '들어온다 - 나간다 ' 하고 천천히 관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노력과 애씀이 필요합니다. 그때는 비추어 보는 것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끊기기도 합니다. 많은 애씀과 장애도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되면 점점 자연스러워 집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비추어 보는 힘이 강해져 자연스럽게 될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매사를 편안하고  단순하며 자연스런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 나와 환경에 귀 기울임
그저 보는 것은 또 우리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주위환경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바다나 강가에 앉아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저 철썩거리는 물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앉아서 오직 그  바다나 강에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파도가 해안을 치거나 강물이 흐르는 물살의 섬세한 소리까지도 듣게 됩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으로  우리는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아주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귀를 기울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우리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자신''나'뿐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이 '나'란  생각, 느낌, 감성 영상 등  변화하는 요소들의 집합체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오직 '귀기울임, 비추어 봄'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여기 한 비구니 스님의 선시가 있습니다.

이 눈으로 예순다섯 번이나
가을이 변하는 정경을 보았네.
달빛에 관하여도 이미 많은 것을 읊었으니
더 이상 묻지마오.
오직 바람 없는 날 솔잎
나뭇잎 소리를 듣고저 할 뿐이라오.

바람 없는 날 나뭇 잎 소리를 경청하는  그런 마음의 고요와 평화는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인 도의  조화와 묘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깨어있고 꿰뚫어보며 능동적으로 환히 비추어 본다는  면에서 그것은 창조적입니다. 그러나 분별과 판단을 떠난  단순하고 순수한 면에서 그것은 또 수동적입니다.  아주 부드럽고 열려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과 명철함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수동성과 함께 지각될 때 마음은 완전히 평정의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저 보는 관찰의 개발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속성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중(concentration)으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하나는 밝게 비추어 보는 것(mindfulness)으로  마음이 부주의하게 되는 것을 막고 그때 그때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환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 즉 집중과 비춰 봄이 함께 개발되면 마음의 균형은 이루어지고 '깊은 들음(profound listening)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런 깊은 들음을 통하여 우리들 존재의 모습은 드러나게 됩니다. 지혜는 특별한 대상이나 경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스즈끼 선사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생긴 것은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행은 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루어야 할  경지나 집착할 만한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이나 흐름의 한 부분으로 보면 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 있고 밝은 마음입니다. 특별히 이상한 체험을 얻으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혹 이상한 체험이 일어 난다해도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무상할 뿐이며 따라서 관찰의 대상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경지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그 흐름을 관찰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 무상의 흐름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그리고 우리들 존재의 모든 부분이 변화하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에  분명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눈 뜰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오래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흐름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아무 것도 거부하거나 어느 것에도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르마의 자기 나타냄과  하나가 될 뿐입니다.

생각과 감각의 대상

* 생각의 관찰
생각을 비추어 보는 것은 위빠사나 선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그대로를 의식하지 못하면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의 객관적 성격을 알 수 없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각과 우리 자신을 얼마나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이 동일시가 생각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  즉 자아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생각을 관한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날 때,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저 '생각이 일어난다'하고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즉 생각의 내용을 가지고  다른 것과 연상을 하거나 왜 그 생각이 일어날까  하는 분석  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별한 순간에 그저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만을 비추어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생각', '생각' 하고 마음 속으로 주목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생각의 내용에 대하여 판단이나 반응,  또는 '내'가  생각한다. '내 생각'이다 하지 말고 단순히 일어나는  생각을 그대로 관하십시오.  생각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뒤에 아무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생각은 생각하는 것 자체일 따름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처럼 비추어 볼 수 있을 때,  생각은 사라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밝게 비추어 보면  그 생각은 곧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다시  기본 호흡관으로 돌아갑니다.  혹 어떤 사람은 생각에 대한 마음의 주목을  좀더 엄밀하게 하여 생각에 따라  '계획', '상상', '기억'하고 표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집중력을 더 날카롭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단순히 '생각', '생각' 하는 마음의 주목으로 충분합니다. 생각이 일어난 한참  뒤가 아니라, 일어난 즉시에 비추어 봐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정확히 비추어 보게 되면 생각으로  마음이 번거롭게 되지 않습니다. 생각이 수행에 방해나 장애가 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생각은 하나의 훌륭한 관의 대상, 선의 주제입니다.  마음이 흐리멍텅해지거나 생각과 함께 놀아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비춰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선의 마음, 시작하는 마음>(Zen Mind,Beginner's Mind) 에서 스즈끼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좌선을 할 때 억지로 생각을 끊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스스로 쉬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생각이 마음 속에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대로 그냥 두십시오.  그러면 곧 없어지게 됩니다.  생각을 억지로 끊으려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흔히 마음 밖에서 무엇이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물결에  불과합니다. 그 물결에 방해받지 않게 되면 그 물결은   스스로 조용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감각이나  생각, 영상들도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다름아닌 우리들 마음의 물결입니다.  어떤 것도 마음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을 그저 있는대로 놔두면 마음은 스스로 조용해집니다.  이런 마음을 큰 마음이라 부릅니다."

그저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두십시오.  모든 영상, 생각, 감각, 등도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냥 두십시오.  그것들을 귀찮게 여기거나 어떤 반응과 판단을  나타내지도 말며 또 집착하거나 동일시 하지도 말고  그대로 두십시오.  단, 정밀하고 조심스럽게 들고 나는 마음의 물결을  비춰 보면서 '큰 마음'이 되십시오.  그렇게 하면 곧 조화롭고 조용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절대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들어온다-나간다', 혹은  '올라온다-내려간다'하고 호흡을 관하건,  감각, 생각을 관하건, 순간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비춰봐야 합니다.  조용하고 조화로운 마음으로, 매순간이 대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감각 대상의 관찰
수행 중에 어떤 시각적 영상이 떠오르면 좋다,  싫다 평가하지 말고 그저 '봄' '봄' 하고 마음으로
주목 하십시오. 단순히 그 영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비추어 보십시오. 또 어떤 소리가 현저히 들려오면,  내력을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그저  '들음',  '들음'하고 비추어 보십시오.  냄새나 향기가 날 때도 '냄새', '냄새' 하고  비추어 보고, 사라지면 본래의 호흡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기본 관이 잘 되면 될수록 다른 관도 잘 될 수 있습니다.

* 고요하게 깨어 있음
비추어 보는 힘을 키우는 강력한 계기는  대상에 대한 표시(마음의 주목)를 늘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수행의 처음에는 대상에 대한 주목이  잘되지 않아 한참 잊어버린 뒤에 다시 되곤 합니다.  우리들의 수행은 순간마다 호흡의 흐름 -> 몸의 감각-> 생각 등 다른 대상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될 때 깊어질 수 있습니다.
수행을 통하여 개발되는 밝게 비추어 보는  힘이 바로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세세한 현상의 흐름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마음 상태를 지켜야  될 지에 대하여 훌륭한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복잡한 저자거리를 물이 가득찬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도록 명령받은 한 사람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뒤에는 칼을 든 병사가 따랐습니다.
물을 한방울이라도 흘리면 목을 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틀림없이 그 사람은 환히 비추어 보는 마음으로 잘  살펴서 걸었습니다. 그러나 긴장해서는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무리하여 힘을 주거나 긴장하여 부딪히면  물은 넘쳐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눈 앞에 변화하는 정경의 흐름에 따라  느슨하면서도 율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순간순간 주의 깊지 않으면 안됩니다.  환히 비춰보는 능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고요하면서도  깨어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 순간 순간의 선
순간 순간 비추어 보는 마음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미래에 무엇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고요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즉 현재에 '있는'  노력입니다.

한 수행자가 선사를 방문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날은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우산을
문밖에 두고 들어갔습니다. 인사를 받고 나서 선사는  수행승에게 신발의 어느 쪽에 우산을 놓고 들어왔는지를  물었습니다. 7년을 더 닦은 뒤에야 그 수행승은 순간순간의 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우리들이 하는  일마다를 비추어 보는 꾸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올라온다-내려간다', 혹은  '들어온다-나간다'하고 관하고, 그로부터  일어나고  세면하고 걷고 앉고, 다시 일어나서 식사하러 가는 등,  모든 행위에 관계된 움직임을 낱낱이 비추어 보십시오.  잠자기 위해 누울 때도 잠드는 순간까지  '올라온다-내려간다','들어온다-나간다'하는 관을 계속  하십시오. 이와 같은 훈련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행을 오직 앉고 걷는 것 뿐이라 생각하여 그 밖의  시간을 게을리 하게 되면 그간에 쌓아온 지속력을  잃게 됩니다. 하루종일 끊이지 않는 강한 통찰력은  우리들 마음을 고요하고 하나되게 합니다.  이렇게 굳고 균형된 마음으로부터 깨침은 가능합니다.  수행에 무가치한 환경은 없습니다.  깨침에 필요한 요소들이 성숙하고 조화를 이룰 때  진리에 대한 깊은 직관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 직관의 순간
부처님을 일생 동안 시봉했던 아난존자에 관한  얘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했던 그는 자신을 위한 수행을 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깨침을 이루었으나 그는 아직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오직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정진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 안되어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큰 결집회의를  열었습니다. 대중들은 499명의 깨친 제자들과 아난존자를  대표로 뽑았습니다. 그들은 아난이 깨침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일 많이 들었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선출했습니다.  결집의 날이 가까워오자 다른 스님들은 아난에게 용맹정진을  권유했습니다. 그는 '들어온다, 나아간다, 내려놓는다'하고  걷는 훈련을 했습니다. 자정이 넘고, 1시, 2시,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 아난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자세히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거의 무든 가르침을 다 들은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기 마음이 균형을  잃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충분한 집중과 안정없이  너무 지나친 노력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기대와 예측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균형을 찾기 위하여 누워서 관을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일거일동을 세세히 비추어 보면서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의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그는 깨쳤습니다. 그때가 새벽 4시,   6 ~ 7시까지  그는 열반의 즐거움을 즐겼습니다.  아침에 아난은 시원스런 모습으로 결집에 참석했고,  모든 사람들은 그가 깨침에 이른 것을 알았습니다.

무명의 구름이 언제 걷힐지 모릅니다.  그것은 심지어 눕는 순간에도 옵니다.  항상 비추어 보십시오!  매 순간 순간 일어나는 일에 깨어있고  방심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수행을 매일 매일 쌓아 갈 때  마음은 비상한 힘을 갖게 됩니다.  이 수련기간을 최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시간을 낭비하거나,"이만하면 됐다"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늦은 밤에도 잠이 오지 않으면 수행을 계속 하십시오.  흔히 늦은 밤 시간이 수행에는 제일 좋습니다.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  그러나 힘으로 무리하거나 긴장을 초래케 해서는 안됩니다.

* 한 밤의 수행
내가 인도에서 처음 수행할 때 복도 건너편에  한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정진의  귀감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볼 때마다 그는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열시나 열한시 쯤이면 나는 잠자리에 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에 켜진 불을 보고 용기를 얻어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걸은 후에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앉아 한 두시간을 더 앉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앉고 걷는 훈련을 번갈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었고  그것은 아주 값진 것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쌓아온 선정과 관조의 힘이 응축되었기 때문에 하루의 수행이 끝나는 밤시간에 우리들 마음은  꿰뚫는 통찰력을 갖게 됩니다.
만약 그런 마음의 상태를 느끼면 수행을 계속 하십시오.  경험할 것도, 경험할 우리들 마음의 단계도 아주 많습니다. 버마에 있는 많은 선원에서는 수행자들이 처음에는  네 시간의 수면으로 시작하여 수행이 깊어질수록  수면시간을 더 줄여갑니다.  우리는 일곱 내지 여덟 시간은 꼭 자야한다는  인습적인 생각의 덫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낡은 습성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하루종일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탓하지 않으며, 편가르지 않고 균형과 평정을 유지하면 긴장이나 피로는 쌓이지 않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버마에서 수행할 때 닷새 동안 잠을  자지않고 정진해도 전혀 피로한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도 다름아닌 이 위빠사나 수행을 차분하고 리드미컬하게 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때의 상태에 민감하십시오. 그래서 피곤하거나 졸리지 않으면 밤새 수행을 계속해도 좋습니다.

의지 작용을 비추어 봄
의지의 작용은 순간 순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마음의 일반적인 모습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강하게 나타날 때는 관해야 합니다.  의지의 작용은 어떤 행위에 앞서 일어나는  마음의 충동이요 신호입니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인 의지의 작용을  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생각대로 행위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의지의 작용을 의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저 자동적으로 행위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앉아서 참선을 하다가 일어날 때,  실제 일어나는 행동이 있기에 앞서  '일어나고 싶다'는 의지의 작용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일어나고 싶다는 의지의 작용을 관할 수 있을 때  필요하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더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의 작용을 관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충동대로 그저 일어나고 맙니다.  우리 몸의 모든 자율적인 행동은 그렇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앉아 있다가 일어 나든가, 서 있다가 걷는 등 ,  자세의 변화를 일으키기 전 의지의 작용이 마음 속에  나타나면 그것을 관하십시오.  걷는 선 중에 멈출 때에도 멈추려는 의지의 작용이  먼저 있습니다. 그것을 비추어 관하십시오.  매 걸음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걷는 끝까지 와서 걸음을 돌릴 때  돌리려는 의지의 작용을 비추어 보는 것은 훈련에  도움이 됩니다.
발이 저절로 돌리는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전에 돌리려는 의지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의  인과관계가 일어나는 모습을 알게 됩니다.
어느 때는 몸이 원인이 되고 마음이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느 때는 마음이 원인이 되고 몸의 움직임이 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돌리려는'의지작용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다리가 움직입니다. 돌리는 어떤 고정불변한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반적인 인과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돌릴 때 어떤 과정으로 돌리게 되는지 그 과정을 관하지 못할때 우리는 돌리는 어떤 주체가 따로 있는 양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한기를 느껴서 스웨타를 입었다고 해봅시다.  한기라는 육체적인 감각으로 인하여 따뜻하게 하려는  욕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욕구로 인하여 옷을 더 입어야겠다는 의지의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  의지작용으로 인하여 몸이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비추어 봄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 과정이 어떻기 일어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좌선에 있어서도 어떤 움직임이 있기 전  그 의지작용을 관해야 합니다. 자세를 바꾸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작용이 먼저 있을 것입니다. 침을 삼킬 때에도 그에 앞서 그럴려는 의지작용이 있습니다. 눈을 뜰 때에도 뜨려는 의지가 작용됩니다.  이 모든 의지의 작용들을 반드시 비추어봐야 합니다.  의지의 작용이 항상 생각이나 말로  구체화되어 나타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순히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충동이거나 신호로 느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 적절한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자극을 알면 됩니다.  몸과 마음의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모습을 알게 되면  '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없어지게 됩니다. '나'는 어떤 고정불변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들이 인연따라 모인 것에 불과합니다.

* 먹는 것도 선
우리가 무엇을 먹는 동안에도 몸과 마음의 여러가지 다른 과정은 계속 됩니다. 그 과정을 차례대로 비추어 보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먹는 일을 완전히 즐길 수 없습니다. 음식을 씹으면서도 우리의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다니기 쉽습니다. 음식을 먹게 될 때 우리는 먼저 음식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 때 "본다, 본다"하고  마음속으로 주목 하십시오. 다음은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의지의 작용이 나타납니다.  그 의지의 작용도 '의지, 의지'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먹으려는 의지의 작용은 팔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때도 '움직인다, 움직인다'하고 봐야 합니다.  손이나 수저가 음식에 닿을 때 접촉의 느낌이 있게 됩니다.  그 느낌을 느끼십시오.
다음엔 팔을 들어올리려는 생각이 있고, 들어올리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을 하나 하나 관해야 합니다.  입을 열고 음식을 넣고, 입을 닫습니다. 팔을 내리려는  의지작용, 그리고 실제 팔을 내기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차례로 관해야 합니다.  입안에 있는 음식의 감촉, 씹는 움직임, 그것들을  그대로 느끼십시오. 씹기 시작하면 맛에 대한 감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맛을 그대로 느끼십시오.  계속 씹으면 맛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삼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차례로 하나 하나 관하십시오.  그 일련의 과정 뒤에 '먹는'어떤 누구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의지작용 -> 움직임 -> 맛 -> 감촉의 연속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존재의 식상입니다. 일련의 일어남이며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과 흐름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을 때 '나'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모든 작용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입니다.  의지, 생각, 감각, 움직임, 이 모든 것은 서로 깊은  상호관계 속에 있습니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는 원인이 되고, 또 몸의 감각이  욕구와 의지작용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먹을 때 그 과정을 관하지 않습니다.  맛은 금방 느꼈다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맛을 계속해서  즐기려는 욕심으로 입안에 음식이 있는데도 팔은  더 많은 음식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그 과정을 비추어볼 여유가 없습니다.  입안에 든 음식을 먼저 완전히 드십시오. 그런 다음 그 다음 숟갈로 드십시오.  이렇게 하면 관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들 몸에 대하여 예민하게  되고 필요한 음식의 양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먹는 것을 비추어 보는 관이 가능할 때  과식이란 좀처럼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수련기간 동안 모든 것은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필 수 잇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수행이 잘 되어 관이 성숙되면 매사를 빠른 속도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훈련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서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침묵 속에 환히 비춰 보면서 천천히 하십시오.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관의 훈련이 하루 종일  끊이지 않도록 먹는 선을 일상적인 훈련 속에 끼워 넣으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 때 까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대로 관이요 선이 되도록 비추어 보십시오.

* 호흡을 세는 집중 훈련
오늘은 마음을 집중하는 훈련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것은 호흡을 세는 수식관입니다.  이 훈련은 특별히 마음이 산란할 때 유용합니다.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내쉬는 숨, 즉 아랫배가 내려갈 때 하나, 둘, 셋.... 이렇게 열까지 세는 것입니다.  열까지 세곤 다시 하나로 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중간에 몇까지 셌는지 잊어버리면  '하나'로 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이 훈련 중에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호흡만 세면 됩니다. 때로는 호흡이 빠르기도 느리기도,  또 가늘어지고 깊어지기도 하는 등 불규칙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말고 그대로 하나에서 열까지 세기만 하면 됩니다.  한 5분쯤 세다가는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내가 열까지 세려고 이렇게 앉아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세십시오. 만일 그런 생각 때문에  어디까지 셌는지 잊어버렸으면'하나'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몸에 긴장과 고통이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시하고 오직 '하나,.......열' 세십시오. 이 방법은 우리들 마음을 통일시키고  한 곳에 집중시키는 특별한 훈련입니다.  이 훈련이 유용하다고 느껴지면 가끔 좌선  중에 활용해도 좋습니다.

* 믿음
이 수행의 길에 있어서 믿음은 소중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깊은 믿음을 가질 때 장애가 되는 의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의 믿음은 단순히 나를 즐겁게  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저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믿을 뿐입니다.  그런 믿음은 맹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좀 높은 차원의 믿음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지혜나 자비 등 그 사람의 훌륭한 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그 사람의 훌륭한 면을 통하여  나에게도 그같은 면을 개발케 하므로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의 진리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깊은 차원에서 알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진리에 대한 확신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맹목의 느낌이나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재의 깊은 관조로부터  오는 그런 확신이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요  스스로의 가능성에 관한 믿음입니다.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확고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을 의지하여라.   그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아니된다.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그 밖에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아니된다.....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나 자신과 진리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죽음과 자비의 명상
* 무상, 죽음, 그리고 무집착
안으로 비춰 보는 이 훈련은 줄타기에 견줄 수 있습니다.  줄 위를 걸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줄 위를 걷는 동안 시야에 여러가지가 스쳐가듯 우리의  수행 중에도 여러가지 정경과 소리들 그리고 감동, 생각,  깨달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그 경험들이 즐거운 것이면 우리들 마음은 그들을  가까이 하고 붙들고 늘어지며 오랫동안 함께 하려 합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불유쾌하면 싫어하고 멀리하려 합니다. 어느 경우나 우리 마음이 움직이고 집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균형을 잃게 됩니다.  대상을 향한 좋은 반응, 나쁜 반응 모두 똑같이 위험합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나 ,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나  마음의 균형을 잃게 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균형을 잃으면 줄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그러한 경계들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하지 않는 조용한 마음을  개발하려 노력합니다.  즉,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엇이나 오고 가는 것을  그저 비추어 보는 마음의 개발입니다.  무상을 꿰뚫어 보는 일은 죽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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